하동현의 양망일기 ㉒ 응답하라1984
하동현의 양망일기 ㉒ 응답하라1984
  • 현대해양 기자
  • 승인 2019.12.09 16: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현대해양] 세상사 모든 것들에는 ‘처음’이 존재한다. 내 인생을 채웠던 수많은 ‘처음’ 중에서 ‘첫 뱃길’을 돌이켜 본다. 그때 그 젊음에 대한 아스라한 그리움, 그 ‘처음’이 없었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니.

-장편수기 ‘마린보이의 꿈’에서 발췌, 재구성한 글이다.

 

1 아들에게.

-네가 태어나기도 전 까마득한 시절, 바다에서 보낸 아비의 청춘을 이야기하려한다. 걸음마를 떼고 장난감들을 앞에 했을 때, 성큼 배를 골라 나를 미소 짓게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언젠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그 시절을 말하려니 가슴이 뛴다. 나도 모르게 흥에 겨워 들뜨는 것을 경계해야겠기에 짧은 재주나마 글로 남겨 본 것이다. 원래 모든 글이란 연애편지 같아서, 가슴을 쥐어 짜 쓴 것도 다음날 술 깨고 읽으면 가소롭기 짝이 없는 법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행여 힘든 시절을 보냈다는 어설픈 자기연민이나, 지금의 세상과 달라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보이더라도 괘념치 마라. 고된 시간들이었으므로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아프다는 신파도 없고, 장중한 교훈이나 삶의 비결 같은 것은 더더욱 없다.

무릇 세상은 걸인과 성자가, 진실과 모순이 함께 섞여 사는 곳이고, 각자가 다른 경계와 주어진 숙명을 살면서 획득한 소박하고 작은 역사가 있을진대, 너는 단지 뱃놈이라는 운명에 순응했던 아비의 젊은 날과 내 인생을 관통하는 단어, 그 ‘바다’를 이해하려는 마음만 가지면 된다.

시작한다. 한 번 읽어 봐 주겠니. -

 

2 빛바랜 가슴 속 앨범에서 푸릇한 스무 살 시절의 나를 불러내 본다. 젊음 하나만으로 마주쳤던 바다는 세상에 무엇으로 빚어지며 어떻게 남겨질 것인지 가슴 앓았던 그 시절 내 존재의 유일한 증명이다.

끝없는 항해와 전쟁과 다름없던 원양어선의 고기잡이는 낯설고 새로운 세상이었다. 바다에서 보낸 젊음은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고, 날개 죽지가 녹아내리면서도 멈추지 않은 태양을 향한 ‘이카로스’의 도전처럼, 온몸으로 부딪혀낸 혹독한 체험이자 현실이었다.

지금도 눈감으면 들을 수 있다. 정복자들의 진군나팔 같이 휘몰아치던 파도소리, 바람소리. 강력한 허리케인 속에서 낙엽처럼 뒹굴던 배에서의 전율 같았던 카타르시스.

황천 파도 아래 곤두박였다가 솟구치던 젊은 날과 뱃전을 난타하며 줄기차게 불어오던 바람. 바닷새들이 먼 곳을 날아와 제 무게를 버리고 배에 걸터앉아 허공을 노려보던 그 아득한 수평의 세계. 나는 내가 바다가 될 수 없음에 기꺼이 좌절했다.

시간이나 세월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었다. 오늘 펼쳐진 바다는 더 이상 어제의 바다가 아니었으며 떠다니던 곳, 마주치는 곳마다 따로 존재하던 세상과 시간의 나이테가 켜켜이 쌓여 세월이 되었다.

누구나 저마다의 청춘을 향유하고 떠나보낸다. 인생의 해답은 바다를 포함한 모든 사회의 어떤 영역에서가 아니라 치열하게 보냈던 ‘시절’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무작정 바다를 향한 열정에 몸을 맡겼던 젊은 항해사의 그 ‘시절’. 그러니까 조지 오웰이 현대사회의 뒤틀린 모습을 그린 소설 ‘1984’와 일치되는 그 해 시작된, 신출내기 항해사의 고삐 풀린 기억들 말이다.

그리고 출가의 길처럼 아득했던 뱃길에서 내 길동무들이었으며 영원한 이방인의 꼬리표를 지녔던 동행들. 가족들을 굶기지 않아야하는 절체절명의 명제에 갇혀, 누가 더 가난에 익숙하며 힘든 세상을 살아왔고 누가 더 남자다운 호기를 가졌는지 우겨대던,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운명을 가졌던 뱃사람들과 함께했던 기억들이다.

바다, 그 고행의 장소에서 끄집어낸 기억들은 갓 깨어난 꿈처럼 언제나 새롭다. 아등바등 꾸려가는 삶에서 진실 된 나와 대화하고 싶을 때, 마음속의 뱃길을 불러내 나를 내려놓고 옥죄며 다시 정신을 추슬러본다.

아비가 어떤 청춘을 보냈으며 어떻게 세상을 걸어왔는지, 지난한 과정보다 탁월한 결과만을 칭송하는 시대에 승자도 패자도 없었던 바다에서의 도전과 응전을 보여주고, 젊은 날 몸으로 부딪혀낸 아비와 함께했던 바다를, 그 설레던 뱃길에 대한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3 1984년 3월, 라스팔마스.

수직강하 하듯 툭하고 떨어지며 고도를 낮추는 비행기 창밖으로 일그러진 낮달이 어슴푸레 하늘에 걸려있었다. 마드리드에서 네 시간 걸리는 마지막 비행, 네 번을 환승하며 2박3일이 걸린 긴 여정이다.

라스팔마스(Las palmas). 야자수가 많다는 데서 기원한 이름, 1492년 콜럼부스가 신천지 아메리카로의 항해를 위해 베이스캠프를 차렸으며, 훗날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가 처음으로 혁명의 기치를 올렸던 역사를 가진 항구다. 세계의 뱃놈들이 다 모여 북적대는 한국원양어업의 전진기지. 아프리카 북단 카나리아군도의 한 섬, 영원히 잠들지 않는 천사와 악마의 항구.

원양트롤어선 D호의 이등항해사. 나는 스물 셋이었고 아프리카 어장을 버리고 새로운 어장 뉴질랜드로 배를 회항시켜야할 임무를 안고 그곳으로 날아가야 했다.

피 끓는 혈기를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이었고, 눈으로 보이지 않으며 손으로 잡히지 않는 그 무엇들을 동경했지만, 그것들은 아수라 같은 세상을 버리고 가없이 넓고 검푸른 바다에서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3 시절, 가난에 발목을 잡혀 대학을 가네 마네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나갈 때, 담임 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러 천천히 말씀하셨다.

“사관학교를 제외하면 수산대학이 등록금이 제일 싸네. 거기 나온 뱃놈친구가 하나 있는데, 원양어선 선장 한 어기에 집 몇 채 값을 벌더라. 진짜야. 그리고 선박특례보충역으로 오년 배타면 군대도 면제야. 어때? 돈도 벌고 군대도 대체복무형태에, 내가 너라면 말이야. 바다에서…….”

젊고 화끈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틀에 갇힌 자신의 처지가 그 친구와 비교되어 울컥하는지 손마디를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뜬금없이 산동네 입구 부잣집 갈래머리 여학생이 두드리던 피아노 연습곡 ‘엘리제를 위하여’ 멜로디에 파도소리가 환청같이 겹쳐 흘렀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 허드렛일로 하루 벌어 그날의 초라한 밥상을 차려내던 어머니, 헤진 옷을 줄여 입혔던 어린 동생의 모습이 그 짧은 면담에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비장하게 대답했었던 것 같다. 예,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바다가 내게로 왔다. 국어사전에서 바다를 뒤적여 봤다.

-지구상에서 육지를 제외한 짠 물이 괴어 전체가 하나로 이어진 큰 부분.

피식 웃음이 났다. 이건 좀 아닌데. 대추를 찾으면 대추나무의 열매라 되어있고, 대추나무를 찾으면 대추가 열리는 나무라 되어있는 게 사전이라는 기인 소설가의 말이 떠올랐다.

내 두 눈과 근육, 그리고 가슴으로 바다와 간절히 맞닥뜨리고 싶었다.

 

4 곡절 끝에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광주항쟁으로 시작된 휴교령에 민주화의 물결과 학생운동이 휘몰아쳐 수업 반, 데모 반이었다.

창창한 앞날을 바다에 저당 잡히고 막걸리나 마셔대던 우리에게 민주화 어쩌고 하는 지엄한 구호들은 강 건너 불이었다. 그 의미를 알 수도 없었거니와 알려하지도 않았다.

운동장을 몇 바퀴 구보로 돌고 우리만의 밀교의식 같았던 선배들의 ‘사랑의 매’에 뒤이은 체육행사 후, 운동장 뒤편 얕은 동산에 둘러앉아 뒤풀이 막걸리 파티를 할 때다.

‘검푸른 파도 삼킬 듯 사나워도’로 시작해 ‘꿋꿋하게 살다가 사나이답게 죽으리라’로 넘어가는 우리 권주가 겸용 해군가를 목 터져라 부를 때, 지명수배를 피해 신출귀몰한다던 학생운동의 전설로 불리는 영웅, 서울의 모 대학 정치관련 학과에 진학했던 내 고등학교 동창 선배가 들이닥쳤다.

밥 먹고 데모만 했던지 혈서 쓰느라 붕대 칠갑한 손가락을 휘두르며 우리를 통렬히 꾸짖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휑하니 제 갈 길을 가버렸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깃발이 휘날릴 때까지 젊음을 송두리째 바쳐 비겁한 세상과 싸워야할 이 때, 무슨 개뿔 같은 바다의 낭만을 읊조리는 술타령이냐고, 후세에 비겁자로 기록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발 정신들 차리고 자신의 고난에 찬 길에 합류하라는 준엄한 질타였다.

세월이 흘러 베테랑 원양어선 선장으로 수출가공어종을 잡느라 뼈 빠지게 그물질 하고 귀국했을 때, 민주화로 도배를 했던 이 양반이 그 불타던 구국의 신념은 어디에 흘렸는지, 충실한 정치판 끄나풀 노릇의 대가로 외국계 프랜차이즈 푸드 체인점을 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십 수 년 전 자신의 예언대로, 마침내 이 땅에 도래한 자유민주화의 열풍과 생활수준 상승에 힘입어 사업이 날개를 단 듯 번창일로라는 동창들의 전언이었다.

‘푸웁’, 나는 소주 한 병 나발 불고 솟아오르는 욕지기를 달랬다. 잔대가리 변절자여, 잘 처먹고 잘 살아라. 너희가 진정한 애국을 아느냐.

어장학(漁場學) 특별강의에 초빙되어 오신, 어선 선장 출신 백발의 노 선배님께서 ‘바다를 다스리는 자 세계를 제패 한다’라고 칠판에 쓰시고는 열변을 토하셨다. 나라살림이 변변찮던 시절에 목숨을 걸다시피 한 고기잡이로 외화벌이의 일등공신이 되어 국가발전의 초석을 다지셨노라고.

70년대 말까지 이 나라의 후진국형 수출에서 단일 품목으로 원양수산물의 비중이 그만큼 컸다는 말씀이었다. 덧붙여 현대화된 항해계기도 없이 해와 달, 별자리를 도구로 하는 천문항법(天文航法)으로 파도를 가르며 새로운 어장에 도착하기까지의 그 험난한 여정을 설명하셨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어장에서 무슨 고기인지 물 반에 고기 반이라, 물 위에 태극기봉을 내리꽂으니 몇 분을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더라는 농반 진반 의 원양개척 후일담을 들려주실 때, 가슴에 꽂히는 찌릿한 전율로 숨이 막혔다. 항구의 선술집에서 북유럽 뱃놈들과 벌어진 술 시합, 임전무퇴의 각오에 누구도 못 말릴 한국 뱃놈의 병나발로 제압 하셨노라는 무용담을 곁들이실 때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상하게도 비극적이며, 험난한 뱃길과 맞닥뜨려야할 우리 앞날의 운명이 어떤 축복 같은 느낌이었다. 졸업식 참석은 언감생심으로, 출항 스케줄에 맞춰 우리는 봇짐을 챙겨 망명처럼 배에 올라야 했다. 대폿집 골방에서 배 타고 와서 갚겠노라 외상 그은 막걸리에 취해 ‘선구자’를 불렀다. 대폿집 할머니가 혀를 찼다.

‘아이고, 이 어린 것들이 그리 멀리 배 타러 간다꼬...’

우리는 가슴에 불화살 한 다발씩을 품고 오대양육대주의 배에 뿔뿔이 흩어져 올랐다. 누구는 북양(北洋)의 명태 잡이 배로, 태평양과 인도양의 기지선에, 또 누구는 대서양(大西洋)으로. 내 뱃놈으로서의 첫 목적지는 라스팔마스였다.

까다로운 신원조회와, 외국 항에서 도망치지 않고 반드시 돌아와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군필을 인정받겠다는 인적보증까지 세우고, 난생 처음 촌닭처럼 비행기에 올랐던, 그 때 그 ‘1984’.

야간비행, 개별램프를 켜고 승무원에게 엽서를 얻었다. 수신인은 지지리도 가난해 대학도 못가고 해병대에 말뚝 박겠다던 어릴 적 불알친구였다. 뱀처럼 혼돈의 똬리를 틀고, 내 청춘을 삼키려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악마의 항구 라스팔마스로 간다, 라고 썼다. 운명을 거스르는 바이킹이 되어 돌아 올 것이니 그때 내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 주겠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